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었다.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길은 외줄기,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고,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어 있었다. 허 생원은 이런 밤이 좋았다. 길이 외로워지면 외로워질수록 그는 나귀의 잔등 위에서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길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고, 끝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한 평생 떠도는 일이 어찌 그리 부끄러운 일이라 하랴. 떠도는 길마다 메밀꽃이 피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였다.
P는 동경 유학을 갔다 온 지식인이다. 학교에 갔고, 학위를 받았고, 돌아와서는 일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일자리는 없었다. 식민지의 거리에는 P 같은 청년이 골목마다 있었고, 골목마다 모두가 같은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P는 깨달았다. 자기는 미리 만들어진 인생이라는 것을. 학교에서 만들어 놓고, 사회는 사 갈 곳이 없는 그 인생. 모자도 양복도 다 갖추었으나 어디로 갈 길이 없는 그 인생. 그것을 P는 레디메이드 인생이라 불렀다. 레디메이드 인생은 만들어지는 데에 평생이 걸리고, 팔리지 않는 데에도 평생이 걸린다.
선비는 인천 부두에서 일했다. 새벽에 나가 밤늦게 돌아왔고, 돌아와서는 또 다음 새벽을 준비했다. 임금이 떼이는 날이 떼이지 않는 날보다 많았다. 선비는 처음에는 화가 났고, 다음에는 슬펐고, 끝내는 무엇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이 인간을 부리는 일이 어디까지 가능한가. 부려지는 자가 그 부림을 견디는 일이 어디까지 가능한가. 그것이 인간 문제였다. 선비는 알지 못한 채 그 문제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알지 못한 채로도 매일 부두에 나갔다. 그것이 살아 있는 자의 일이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있었다.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내 고향이다. 차마 꿈엔들 잊을까.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우어 고이시던 곳. 그곳을 떠나온 지 오래되었으나, 떠나온 만큼 그곳은 더 환해졌다. 사람이 한 번 떠난 자리에서 비로소 환해지는 풍경이 있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 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 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그래도 나비는 다시 날아오를 것이다. 한 번 절어 본 날개는 두 번째에는 더 멀리 갈 줄 안다. 무서운 줄 모르고 날아오른 첫 날갯짓이 그 나비의 평생을 이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떠난 님은 떠난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옆에 있다는 것을. 사랑이란 한 사람이 떠나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며, 도리어 떠난 자리에서 더 또렷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이별한 것이 아니라 이별이 우리를 더 단단히 묶었다. 침묵 속에서 님은 더 가까이 있다.
내 일생은 무엇이 될까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되지 않을까를 고민하는 것으로 거의 다 갔다. 사람들은 무엇이 되기 위해 살지만, 나는 다만 무엇이 되지 않기 위해 살았다. 되지 않기 위한 일이 되기 위한 일보다 훨씬 어렵다. 매일 거울을 보며 거울 속의 나에게 묻는다. 너는 오늘 무엇이 되지 않았느냐. 거울 속의 그가 답한다. 다만 살아 있었을 뿐이다. 그 답이 마음에 든다. 종생기란 결국 그런 답을 모은 책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별이 스치운다는 것은 별이 우는 것과 같다. 별이 우는 밤에는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곧 시인이다. 시인은 별의 울음을 받아 적는 자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한 마리 거대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는 갑옷처럼 단단한 등을 침대에 대고 누워 있었고, 머리를 약간 들면 갈색의 둥글게 부풀어 오른 배가 보였다. 가족들은 처음에는 놀랐고, 다음에는 미안해했고, 끝내는 그가 사라지기를 원했다. 그레고르는 알고 있었다. 자기가 더 이상 가족에게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것을 안 순간, 그레고르의 등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무거운 등을 진 자는 결국 일어서지 못한다.
새는 알에서 빠져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빛과 어둠을 함께 품은 자만이 그 신에게로 갈 수 있다. 한 사람의 일생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길이다. 멀리 떠도는 것 같지만 모든 발걸음은 자기 안쪽을 향해 있다. 안쪽으로 깊이 들어간 자만이 비로소 바깥으로 환해진다.
강은 흘러간다.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강은 늘 그 자리다. 흘러가는 것은 물이 아니라 시간이며,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다. 싯다르타는 강가에서 오래 앉아 있었다. 강이 그에게 가르쳐 준 것은 한마디였다. 모든 것은 동시에 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강은 동시에 흐르고 있다. 어린 시절도 지금도 노년도 한 사람 안에 동시에 있다. 그것을 알면 시간이 무겁지 않다.
노인은 작은 배에 혼자였다. 사흘 밤을 한 마리 큰 물고기와 싸웠다. 사람은 패배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람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 마침내 물고기를 잡아 끌고 항구로 돌아오는 길에 상어 떼가 달려들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노인은 끝까지 싸웠으나 항구에 닿았을 때 남은 것은 거대한 뼈뿐이었다. 그래도 노인은 패배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진짜 싸움은 늘 자기와의 싸움이고, 자기와의 싸움에서는 누구도 패배하지 않는다.
개츠비는 푸른 불빛을 믿었다. 해마다 우리에게서 멀어져 가는 그 황홀한 미래를 믿었다. 그것은 그때 우리에게서 빠져나갔다. 그러나 상관없다. 내일 우리는 좀 더 빨리 달릴 것이고, 두 팔을 더 멀리 뻗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좋은 아침이…. 그렇게 우리는 흐름을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나아간다. 모두가 그 푸른 불빛을 향하여.
이반 일리치의 일생은 매우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가장 끔찍한 것이었다. 그는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죽음이 그의 곁에 다가왔을 때, 그는 자기가 잘못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사로잡혔다. 그 의심이 그를 가장 괴롭게 만들었다. 죽기 직전 그는 비로소 알았다. 잘못 살았던 것이 사실이라고. 그러나 늦지 않았다는 것도.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한 사람의 일생이 어떠했는지가 명확해진다. 그것이 죽음의 마지막 자비다.
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죄인가, 죄가 아닌가. 라스콜리니코프는 그 질문을 안고 도끼를 들었다. 들고 나서야 알았다. 그 질문 자체가 이미 죄였다는 것을. 죄는 행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의 한 생각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한 생각은 평생을 끌고 간다. 라스콜리니코프는 평생 자기의 그 한 생각과 싸웠다. 마지막에 그가 만난 것은 한 여인의 침묵이었다. 침묵은 가장 깊은 용서다.
오랫동안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어머니의 입맞춤 없이는 잠들 수 없었기에. 어느 날 차에 적신 마들렌 한 조각을 입에 넣은 순간, 잃어버린 줄 알았던 어린 시절이 한꺼번에 돌아왔다. 콩브레의 거리가, 정원의 라일락이, 종소리가, 한 번도 잊지 않았던 듯이 살아났다. 시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가, 아주 작은 감각 하나가 그것을 깨운다. 한 입의 차, 한 줄기의 향기, 한 모금의 빛.
댈러웨이 부인은 꽃을 직접 사 오겠다고 말했다. 그날 아침 거리는 깨끗했고, 빅벤이 시간을 알렸다. 댈러웨이 부인은 알고 있었다. 한 여자의 일생이란 결국 한 번의 파티를 준비하는 일과 비슷하다는 것을. 누구를 부를 것인지, 무엇을 차릴 것인지, 어느 의자에 앉을 것인지. 그러나 진짜 일은 그것들 사이에 있다. 잠깐 멈춰서 들이쉬는 한 호흡, 누군가의 눈을 마주치는 한 순간. 그 사이가 곧 일생이다.
한 줄을 쓰기 위해 사람은 많은 것을 보아야 한다. 도시들과, 사람들과, 사물들을. 짐승과 새와 벌레들을. 어린 시절을. 부모를. 사랑을. 별이 빛나던 밤들을. 그러고도 충분치 않다. 한 줄이 한 줄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이 다시 한 사람 안에서 침묵해야 한다. 침묵 속에서 한참을 지나, 그것이 더 이상 자기의 것이 아니게 된 후에야, 비로소 한 줄이 시작된다.
돌아가자, 돌아가자. 전원이 묵으려 하니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이제까지 마음이 몸의 종이 되었으니, 어찌 슬퍼하며 홀로 슬퍼하지 않으리.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았으니, 앞일은 따라잡을 수 있음을 알겠다. 길을 잘못 들었으나 멀리 가지 않았으니, 오늘이 옳고 어제가 틀렸음을 알았다. 배는 가볍게 흔들리고, 바람은 옷자락을 흩날린다. 길손에게 묻노니, 앞길이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