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그 이름 알아보지 못하도록 세상에 없는 글씨로 당신 이름을 쓰기도 했다
류근 《상처적 체질》
8월 7일 · 맑은 오전
아무도 그 이름 알아보지 못하도록 세상에 없는 글씨로 당신 이름을 쓰기도 했다
류근 《상처적 체질》
아무래도 놓치고 나서 가장 후회되는 것을 한 가지 꼽으라면 단연코 사랑일 것이다. 분명 사랑이었고, 앞으로도 사랑일 테고, 지금도 사랑인 순간들. 조금만 더 용기를 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게 사랑이라 말하면서도 왜 나는 그 앞에서 망설였는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이렇게 그리워할 거면서.
태오 《당신이 정말로 잘됐으면 하는 마음에》
"이만큼 사랑해 주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야.", "내 아픔을 언젠간 너도 이해하게 될 거야." 이런 말들은 와닿지 않는 허풍일 뿐이었다.
정영욱 《구원에게》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전문)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의 표제시. 한용운은 떠난 님을 보내지 않았다고 말하며, 이별을 만남의 다른 이름으로, 침묵을 노래로 뒤집는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김소월 〈초혼〉 (전문)
1925년 시집 《진달래꽃》에 실린 김소월의 시. 죽은 이의 이름을 목이 쉬도록 부르는 전통 초혼(招魂) 의식을, 하늘과 땅 사이 닿지 않는 거리로 옮겼다.
내가 곰이었을 땐 곰을 사랑했고 내가 연어였을 땐 곰을 미워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미워하는 건 그런 까닭이다
글뜸 〈그런 까닭이다〉
오늘 안에 멀리 떠나버릴 나의 누이여 진눈깨비 내리는 바깥이 이상하게 밝구나
미야자와 겐지 〈영결의 아침〉, 글뜸 번역
けふのうちに とほくへいつてしまふわたくしのいもうとよ みぞれがふつておもてはへんにあかるいのだ
1922년 11월 27일, 미야자와 겐지가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누이 도시코를 위해 진눈깨비를 받으러 가던 그날 쓴 시. 사라져 가는 자에게 마지막으로 떠 줄 수 있는 것이 한 그릇의 비라는 자리에 시를 두었다.
비극은 국지성 호우처럼 갑자기 찾아와 맹렬한 슬픔을 남기고 사라진다.
전건우 《어두운 물》
호러 소설가 전건우의 《어두운 물》의 한 자리. 비극이 국지성 호우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와 맹렬한 슬픔을 남기고 사라진다는 결을, 가장 평범한 자연 비유로 새겼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학교에 있을 때도 내내 구를 기다렸다. 만날 시간은 분명 정해져 있고, 그때가 아니면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내 마음은 항상 대기 중이었다. 오 분, 삼십 분, 한 시간이 아니라 하루 종일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심지어 구와 함께 있을 때에도 구를 기다리는 기분이었고, 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도 내가 구를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상대를 끝없이 기다린다는 뜻일까. 구가 죽어버린 지금도 나는 구를 기다리고 있다. 구도 나와 같을까.
최진영 《구의 증명》
2015년 작 《구의 증명》의 결. 밥을 먹는 자리에도 잠을 자는 자리에도 사라진 한 사람을 기다리는 자리에서, 최진영은 살아남은 자의 가장 가까운 슬픔을 적었다.
누나라고 불러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김소월 〈접동새〉
1925년 시집 《진달래꽃》 수록. 의붓어미의 시샘에 죽은 누이가 접동새가 되었다는 옛 설화를 시로 옮긴 작품. 김소월은 죽음 뒤에도 남는 한이 어떤 소리로 우는가를 새의 울음으로 새겨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