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길은 밧줄 위에 있다. 공중 높이 걸린 것이 아니라 땅 바로 위에 걸쳐 있다. 건너라고 놓인 것이라기보다는, 걸려 넘어지라고 놓인 것처럼 보인다.
프란츠 카프카 《취라우 잠언》, 글뜸 번역
▸배경 이야기
카프카 사후 발견된 잠언 모음 《취라우 잠언》의 첫 번째 잠언으로, 1917년 무렵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길을 건너기 위한 다리가 아니라 걸려 넘어지기 위해 놓인 밧줄이라는 상으로, 나아감 자체를 다시 묻는다.
9월 27일 · 짙은 밤
참된 길은 밧줄 위에 있다. 공중 높이 걸린 것이 아니라 땅 바로 위에 걸쳐 있다. 건너라고 놓인 것이라기보다는, 걸려 넘어지라고 놓인 것처럼 보인다.
프란츠 카프카 《취라우 잠언》, 글뜸 번역
카프카 사후 발견된 잠언 모음 《취라우 잠언》의 첫 번째 잠언으로, 1917년 무렵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길을 건너기 위한 다리가 아니라 걸려 넘어지기 위해 놓인 밧줄이라는 상으로, 나아감 자체를 다시 묻는다.
자기로 자기를 일으켜 세우라, 자기를 주저앉히지 말라. 자기가 곧 자기의 벗이고, 자기가 곧 자기의 적이다.
《바가바드 기타》 6장 5절, 글뜸 옮김
《바가바드 기타》 6장은 명상의 장으로, 홀로 앉은 사람의 마음을 다룬다. 같은 낱말 아트만이 한 구절에 여섯 번 되풀이되어, 벗과 적이 한 몸 안에서 서로 자리를 바꾸는 순간을 소리로 새긴다.
일어나라, 깨어나라, 얻은 것을 헤아려 깨치라. 날 선 면도날 위는 건너기 어렵다. 그 길이 그만큼 험하다고, 아는 이들은 말한다.
《카타 우파니샤드》 1.3.14, 글뜸 옮김
기원전 5세기에서 1세기 사이 성립한 《카타 우파니샤드》. 죽음의 신 야마의 집 문 앞에서 사흘을 기다린 소년 나치케타스에게 야마가 들려주는 가르침의 한 대목이다. 면도날의 이미지는 훗날 서머싯 몸의 소설 제목으로도 건너갔다.
있지 않은 것에서 있는 것으로 나를 이끄소서. 어둠에서 빛으로 나를 이끄소서. 죽음에서 죽지 않음으로 나를 이끄소서.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 1.3.28, 글뜸 옮김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 무렵 성립한 가장 오래된 우파니샤드 가운데 하나. 본디 제사에서 사제가 읊던 찬가에 딸린 세 줄의 청원으로, 지금은 인도 전역에서 평안을 비는 만트라로 읊는다. 이끄는 이를 부르되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 안의 부서지지 않는 무언가를 자유롭게 하는 일이다. 아니,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일이다. 아니, 부서지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는 일이다. 아니, 그저 존재하는 일이다.
카프카 《취라우 잠언》, 글뜸 번역
마음속 풀리지 않는 모든 것을 향해 견디는 마음을 가지라. 굳게 닫힌 방을 사랑하듯, 낯선 말로 쓰인 책을 사랑하듯, 물음 그 자체를 사랑하려 애쓰라. 지금 당장 답을 구하지는 말라. 살아 보지 않은 답은 아직 주어질 수 없으니. 그러니 지금은 물음을 살라. 먼 어느 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답 속으로 걸어 들어가 있으리라.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글뜸 번역
저는 그이를 좋아해요, 정말 좋아해요." 엘리자베스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말했다. "사랑해요. 그이에게 헛된 자존심 같은 건 없어요. 더없이 다정한 사람이에요. 아버지는 그이가 실은 어떤 사람인지 모르세요. 그러니 제발 그렇게 말씀하셔서 저를 아프게 하지 말아 주세요.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글뜸 번역
"I do, I do like him," she replied, with tears in her eyes; "I love him. Indeed he has no improper pride. He is perfectly amiable. You do not know what he really is; then pray do not pain me by speaking of him in such terms."
1813년作 《오만과 편견》 마지막 장, 엘리자베스가 아버지 앞에서 다아시를 향한 마음을 처음으로 소리 내어 밝히는 장면. 오해로 시작한 사랑이 여러 달의 유예를 견디고 확신에 이르렀음을, 눈물 한 줄로 증명한다.
나는 숲으로 갔다. 삶을 의도해서 살아 보고 싶었기에. 삶의 본질적인 사실들만 마주하고, 삶이 가르치려는 것을 배울 수 있는지 보고 싶었기에. 그리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내가 살지 않았음을 깨닫는 일이 없도록. 나는 삶이 아닌 것을 살고 싶지 않았다. 삶은 그토록 소중하니까. 꼭 그래야 하지 않는 한 체념을 연습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깊이 살며 삶의 골수를 남김없이 빨아내고 싶었다. 삶이 아닌 모든 것을 몰아낼 만큼 굳세게, 스파르타 사람처럼 살아, 넓게 베고 바싹 깎아 삶을 한구석으로 몰아 그 가장 낮은 바닥까지 줄이고 싶었다. 그리하여 삶이 비루한 것이라면 그 비루함의 참모습을 남김없이 얻어 세상에 알리고, 숭고한 것이라면 몸으로 겪어 알아 다음 길에서 참되게 전할 수 있도록.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숲으로 갔다), 글뜸 번역
I went to the woods because I wished to live deliberately, to front only the essential facts of life, and see if I could not learn what it had to teach, and not, when I came to die, discover that I had not lived. I did not wish to live what was not life, living is so dear; nor did I wish to practise resignation, unless it was quite necessary. I wanted to live deep and suck out all the marrow of life, to live so sturdily and Spartan-like as to put to rout all that was not life, to cut a broad swath and shave close, to drive life into a corner, and reduce it to its lowest terms, and, if it proved to be mean, why then to get the whole and genuine meanness of it, and publish its meanness to the world; or if it were sublime, to know it by experience, and be able to give a true account of it in my next excursion.
1854년 소로가 월든 호숫가 2년의 삶을 적은 《월든》. 그는 삶의 골수까지 빨아내고 싶어 숲으로 갔다며, 본질만 마주하는 삶의 이유를 밝힌다.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머리를 높이 든 곳 앎이 자유로운 곳 좁은 집안의 담벼락으로 세계가 조각나지 않은 곳 말이 진실의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곳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두 팔을 뻗는 곳 이성의 맑은 흐름이 죽은 관습의 황량한 사막 모래 속으로 길을 잃지 않은 곳 마음이 당신에게 이끌려 끝없이 넓어지는 생각과 행동으로 나아가는 곳 그 자유의 하늘로, 나의 아버지여, 내 조국이 깨어나게 하소서.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기탄잘리 35》, 글뜸 번역
Where the mind is without fear and the head is held high; Where knowledge is free; Where the world has not been broken up into fragments by narrow domestic walls; Where words come out from the depth of truth; Where tireless striving stretches its arms towards perfection; Where the clear stream of reason has not lost its way into the dreary desert sand of dead habit; Where the mind is led forward by thee into ever-widening thought and action Into that heaven of freedom, my Father, let my country awake.
1912년 타고르가 직접 영역한 《기탄잘리》 35번. 두려움 없고 앎이 자유로운 곳을 하나씩 열거하며, 그 자유의 하늘로 조국이 깨어나기를 기원한다.
동틀 녘에 미리 스스로에게 일러두어라. 오늘 나는 참견하는 자, 은혜를 모르는 자, 오만한 자, 교활한 자, 시기하는 자, 어울릴 줄 모르는 자와 마주칠 것이다. 그들이 그러한 까닭은 선과 악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선의 본성이 아름다움이며 악의 본성이 추함임을, 잘못을 저지르는 그 사람마저 나와 한 핏줄임을 안다. 같은 피에서가 아니라 같은 지성과 신적인 몫을 나눈 자로서. 그러니 그들 누구도 나를 해칠 수 없다. 아무도 나를 추함에 빠뜨리지 못하기에. 나는 한 핏줄에게 노여워할 수도, 등을 돌릴 수도 없다. 우리는 서로 돕도록 태어났다. 두 발처럼, 두 손처럼, 두 눈꺼풀처럼, 윗니와 아랫니의 두 줄처럼. 그러니 서로 거스르는 것은 본성에 어긋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2권, 글뜸 번역
Ἕωθεν προλέγειν ἑαυτῷ· συντεύξομαι περιέργῳ, ἀχαρίστῳ, ὑβριστῇ, δολερῷ, βασκάνῳ, ἀκοινωνήτῳ· πάντα ταῦτα συμβέβηκεν ἐκείνοις παρὰ τὴν ἄγνοιαν τῶν ἀγαθῶν καὶ κακῶν. ἐγὼ δὲ τεθεωρηκὼς τὴν φύσιν τοῦ ἀγαθοῦ ὅτι καλόν, καὶ τοῦ κακοῦ ὅτι αἰσχρόν, καὶ τὴν αὐτοῦ τοῦ ἁμαρτάνοντος φύσιν ὅτι μοι συγγενής, οὐχὶ αἵματος ἢ σπέρματος τοῦ αὐτοῦ ἀλλὰ νοῦ καὶ θείας ἀπομοίρας μέτοχος, οὔτε βλαβῆναι ὑπό τινος αὐτῶν δύναμαι· αἰσχρῷ γάρ με οὐδεὶς περιβαλεῖ· οὔτε ὀργίζεσθαι τῷ συγγενεῖ δύναμαι οὔτε ἀπέχθεσθαι αὐτῷ. γεγόναμεν γὰρ πρὸς συνεργίαν ὡς πόδες, ὡς χεῖρες, ὡς βλέφαρα, ὡς οἱ στοῖχοι τῶν ἄνω καὶ τῶν κάτω ὀδόντων. τὸ οὖν ἀντιπράσσειν ἀλλήλοις παρὰ φύσιν.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진중에서 그리스어로 남긴 자기 성찰. 2권 첫머리에서, 사람은 윗니와 아랫니처럼 서로 돕도록 태어났음을 아침마다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