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그 이름 알아보지 못하도록 세상에 없는 글씨로 당신 이름을 쓰기도 했다
류근 《상처적 체질》
8월 7일 · 맑은 오전
아무도 그 이름 알아보지 못하도록 세상에 없는 글씨로 당신 이름을 쓰기도 했다
류근 《상처적 체질》
안나는 자신이 홀로 죽고 잊히리란 걸 알고 있었다. 살아 있는 동안 누구에게도 소중한 존재가 된 적이 없으니 죽음 또한 누구도 안타깝게 만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은희경 《시간의 감촉》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건 저 야경뿐이라는 거요
한강 《여수의 사랑》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김소월 〈초혼〉 (전문)
1925년 시집 《진달래꽃》에 실린 김소월의 시. 죽은 이의 이름을 목이 쉬도록 부르는 전통 초혼(招魂) 의식을, 하늘과 땅 사이 닿지 않는 거리로 옮겼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게외다.
윤동주 〈별 헤는 밤〉 (전문)
1941년, 연희전문 졸업을 앞둔 윤동주가 쓴 시. 별 하나에 이름 하나를 붙여 부르며, 식민지 청년의 부끄러움과 그리움이 밤하늘 가득 헤아려진다.
사람은 자기 영혼 속보다 더 고요하고 걱정 없는 안식처를 어디서도 찾지 못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글뜸 옮김
οὐδαμοῦ γὰρ οὔτε ἡσυχιώτερον οὔτε ἀπραγμονέστερον ἄνθρωπος ἀναχωρεῖ ἢ εἰς τὴν ἑαυτοῦ ψυχήν.
《명상록》 4권의 한 대목. 아우렐리우스는 바닷가나 시골로 물러날 것 없이, 언제든 자기 안으로 물러나 쉴 수 있다고 적었다. 마음속이 가장 조용한 안식처였다.
철학에서 무엇을 얻었느냐는 물음에 그는 답했다. 나 자신과 이야기 나누는 힘이다.
안티스테네스, 글뜸 옮김
Ἐρωτηθεὶς τί αὐτῷ περιγέγονεν ἐκ φιλοσοφίας, ἔφη, Τὸ δύνασθαι ἑαυτῷ ὁμιλεῖν.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6권의 문답. 안티스테네스는 철학이 준 가장 큰 것으로, 홀로 있어도 자기 자신과 마주 앉아 이야기할 수 있는 힘을 꼽았다.
내 집에는 의자가 셋 있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한 것, 둘은 우정을 위한 것, 셋은 사귐을 위한 것이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글뜸 번역
I had three chairs in my house; one for solitude, two for friendship, three for society.
1854년 《월든》 〈방문객들〉의 한 대목. 홀로 숲에 살면서도 소로는 고독과 우정과 사귐을 위한 자리를 나란히 두었다. 고독은 닫힘이 아니라 자리를 아는 일이었다.
벗이여, 그대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글뜸 번역
Fliehe, mein Freund, in deine Einsamkeit!
1883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 '시장의 파리들'. 니체는 소란한 무리와 명성의 소음에서 물러나, 홀로 있는 자리에서만 지켜지는 것이 있다고 벗에게 권한다.
밤의 고요 속으로 내게 오세요. 말을 건네는 꿈의 고요 속으로 오세요. 시냇물에 닿은 햇살처럼 맑은 눈으로, 부드러운 얼굴로 오세요. 눈물에 젖어 돌아오세요. 오, 기억이여, 희망이여, 다 지나간 시절의 사랑이여.
크리스티나 로세티 〈메아리〉, 글뜸 번역
Come to me in the silence of the night; Come in the speaking silence of a dream; Come with soft rounded cheeks and eyes as bright As sunlight on a stream; Come back in tears, O memory, hope, love of finished years.
1862년 첫 시집에 실린 로세티의 시 〈메아리〉. 떠난 이를 꿈에서라도 다시 만나려는 그리움을 담아, 시인은 사랑을 붙잡는 대신 고요한 부름의 자리로 옮겨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