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문장
긴 글을 옮길 여유가 없는 날이 있습니다. 한 줄에서 세 줄, 공책 한 귀퉁이면 되는 짧은 글을 모았습니다. 금방 끝나서, 같은 문장을 두 번 세 번 적게 됩니다.
길을 가로막는 것이 도리어 길이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글뜸 옮김
황제가 자기에게 쓴 메모 한 줄. 막힌 날 공책 첫머리에 적어 두기 좋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한 줄이 통째로 물음이다. 물음표까지 천천히 적어 본다.
나는 외로운 사람입니다만, 어쩌면 당신도 외로운 사람 아닙니까. 나는 외로워도 나이가 들어 가만히 있을 수 있지만, 젊은 당신은 그러지 못하겠지요.
나쓰메 소세키 《마음》, 글뜸 번역
선생이 젊은 '나'에게 건네는 말. 외로움을 고치려 들지 않고 나란히 놓아 둔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글뜸 번역
첫 번째 수기를 여는 문장. 고백이 이만큼 짧을 수 있다는 데서 손이 멈춘다.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소리 물의 정적
마쓰오 바쇼, 글뜸 번역
세 줄이면 끝난다. 물소리가 지나간 뒤의 고요는 여백으로 남겨 둔다.
가장 고귀한 복수는, 해를 끼친 그 사람과 같아지지 않는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글뜸 옮김
되갚고 싶은 날에 꺼내 적는 문장. 쉼표에서 한 번 쉬면 뒷말이 다르게 들린다.
아무도 당신에게 충고하거나 도와줄 수 없습니다. 아무도. 길은 단 하나,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글뜸 번역
시를 봐 달라는 젊은이에게 릴케가 보낸 답장. '아무도'를 두 번 적는 동안 시선이 안쪽으로 돈다.
차라리 사랑하고 잃는 편이 낫다, 아예 사랑하지 않은 것보다.
앨프리드 테니슨 〈추모시〉, 글뜸 번역
벗을 잃고 쓴 긴 추모시에서 널리 알려진 두 줄. 짧아서 여러 번 적게 된다.
나와 함께 늙어 가요. 가장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삶의 마지막, 그것을 위해 처음이 지어졌던 그 끝은.
로버트 브라우닝 〈랍비 벤 에즈라〉, 글뜸 번역
첫 줄만 적어도 편지 한 통이 된다. 셋째 줄은 어순이 굽이져 있어 천천히 따라 적게 된다.
당신은 나를 끝이 없게 하셨으니, 그것이 당신의 뜻입니다. 이 연약한 그릇을 비우고 또 비우시어, 언제나 새로운 생명으로 채우십니다.
타고르 《기탄잘리》, 글뜸 번역
《기탄잘리》를 여는 첫 노래. 비운다는 말이 되풀이되는 곳에서 그릇 하나가 눈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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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린 원문은 모두 저작권 보호기간이 지난 작품입니다. 외국 작품의 한국어 번역은 글뜸이 직접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