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문장
사랑의 말은 대개 누군가에게 건네려고 쓰입니다. 여기 모은 문장은 건네지 못한 말, 보내고 난 뒤의 말에 가깝습니다. 한 자씩 옮겨 적는 동안 그 마음을 잠시 빌려 입게 됩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갔다는 말과 보내지 않았다는 말이 두 줄 안에 나란히 있다. '아아'를 적는 데 시간이 걸린다.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김소월 〈먼 후일〉
따옴표 안의 '잊었노라'가 두 번 나온다. 적을수록 잊지 못했다는 말로 읽힌다.
내게 하늘의 수놓은 천이 있다면 금빛 은빛으로 짠 그 천을 당신의 발밑에 펼쳐 드리련만 가난한 나는 가진 것이 꿈뿐이라 그 꿈을 당신 발밑에 깔았으니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은 나의 꿈이니
예이츠 〈하늘의 천〉, 글뜸 번역
가진 것이 꿈뿐인 사람의 선물. 마지막 줄 '사뿐히'를 적을 때 글씨도 가벼워진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은 아직 내 마음속에 다 꺼지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을 더는 괴롭히지 않기를. 말없이, 희망도 없이 사랑했습니다. 그토록 진실하게, 그토록 다정하게 사랑했으니 부디 다른 이도 그렇게 당신을 사랑하기를.
푸시킨, 글뜸 번역
지나간 사랑을 과거형으로 적어 내려가다, 마지막 줄에서 남의 사랑을 빌어 준다. 여섯 줄이 편지 한 통 같다.
내 그대를 어떻게 사랑하느냐고요? 헤아려 보리다. 영혼이 닿을 수 있는 깊이와 넓이와 높이까지 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신의 뜻이라면, 죽은 뒤엔 더욱 그대를 사랑하리다.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소네트 43〉, 글뜸 번역
깊이, 넓이, 높이. 세 낱말을 하나씩 적는 동안 잴 수 없는 것을 재려는 마음이 손에 잡힌다.
그대 늙어 백발이 되고 잠이 많아져 난롯가에서 꾸벅일 때, 이 책을 꺼내 천천히 읽으며 꿈꾸어 보아요. 오직 한 사람만이 그대 안의 순례하는 영혼을 사랑했고, 변해 가는 그대 얼굴의 슬픔까지 사랑했노라.
예이츠 〈그대 늙었을 때〉, 글뜸 번역
먼 훗날 난롯가에서 읽힐 것을 생각하며 쓴 시. 옮겨 적는 지금이 그 '훗날'일 수도 있다.
부드러운 살결에 흐르는 뜨거운 피에 닿아보지도 않고, 쓸쓸하지 않으신가요, 도(道)만 설하는 그대여.
요사노 아키코, 글뜸 번역
단카 한 수를 네 줄로 옮겼다. 점잖은 설법 앞에 던진 되물음이 백 년이 지나도 식지 않는다.
한 젊은이가 한 처녀를 사랑했으나 그녀는 다른 이를 택했고, 그 다른 이는 또 다른 여인과 짝을 맺었네. 그것은 오래된 이야기지만 언제나 새롭다. 그리고 그 일을 겪는 사람의 가슴은 둘로 찢어진다.
하인리히 하이네, 글뜸 번역
엇갈린 사랑을 남 이야기처럼 담담히 늘어놓다가, 마지막 줄에서 목소리가 바뀐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김소월 〈초혼〉
네 줄이 모두 '이름이여'로 끝난다. 같은 말을 네 번 적는 일이 곧 부르는 일이 된다.
아주 오래전, 바닷가 어느 왕국에 당신도 알지 모를 한 소녀가 살았습니다. 애너벨 리라는 이름의 그 소녀는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사랑받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없이 살았습니다.
에드거 앨런 포 〈애너벨 리〉, 글뜸 번역
옛이야기처럼 시작하는 다섯 줄. 바닷가 왕국이라는 말에 벌써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빛이 돈다.
나를 기억해 주세요, 내가 멀리 떠나거든, 침묵의 나라로 아주 가버리거든. 그러나 나를 기억하며 슬퍼하기보다, 차라리 나를 잊고 웃어 주는 편이 훨씬 나아요.
크리스티나 로세티 〈기억해 주세요〉, 글뜸 번역
기억해 달라던 목소리가 넉 줄 만에 잊어도 좋다고 말한다. 남겨질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작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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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린 원문은 모두 저작권 보호기간이 지난 작품입니다. 외국 작품의 한국어 번역은 글뜸이 직접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