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편
시는 눈으로 읽을 때보다 손으로 옮길 때 느리게 지나갑니다. 행이 바뀌는 곳에서 손도 함께 멈추기 때문입니다. 저작권이 만료된 한국 근대시를 중심으로, 필사하기 좋은 시를 골라 두었습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붙잡는 말이 한 마디도 없는 이별. 세 줄을 옮겨 적다 보면 '고이'에서 손이 느려진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 〈향수〉
실개천, 황소 울음, 금빛. 눈앞에 없는 풍경일수록 낱말이 또렷하다. 마지막 한 줄은 따로 떼어 적어도 좋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한용운 〈복종〉
자유를 알면서 고른 매임. '당신에게는'의 조사 하나가 시 전체를 받치고 있다.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남의 나라 육첩방, 창밖에는 밤비. '적어볼까' 하는 망설임까지 함께 옮겨 적게 되는 네 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이육사 〈청포도〉
기다림이 포도알처럼 익어가는 시. '주저리주저리', '알알이' 같은 말은 손으로 써야 맛이 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기다림과 여읨이 꽃 한 송이에 함께 들어 있다. '뚝뚝'을 적을 때 꽃잎 지는 소리가 들린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정지용 〈유리창 1〉
아이를 잃은 아버지가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다. 울음은 끝까지 나오지 않고, 마지막 줄에서 산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욕심부리지 않고 결코 화내지 않으며 늘 조용히 웃고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글뜸 번역
이기겠다는 말이 없는 다짐. '되고 싶다'로 끝나서, 옮겨 적는 사람의 바람으로도 읽힌다.
희망은 깃털 달린 것 영혼에 머물며 가사 없는 노래를 부른다. 결코 멈추지 않고.
에밀리 디킨슨 〈희망은 날개 달린 것〉, 글뜸 번역
희망을 새 한 마리로 옮겨 놓은 네 줄. 짧은 행마다 숨을 한 번씩 쉬며 적기 좋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컸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드리우시고, 들판에는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열매들이 무르익도록 명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주시어,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맛을 불어넣어 주소서.
릴케 〈가을날〉, 글뜸 번역
여름을 보내며 올리는 기도. 이틀만 더, 라는 청이 소박해서 오래 남는다.
왜 푸른 산에 사느냐 묻기에 웃으며 답하지 않으니 마음이 절로 한가롭다 복사꽃 물에 실려 아득히 흘러가니 여기 따로 천지가 있어 인간 세상이 아니로다
이백 〈산중문답(山中問答)〉, 글뜸 번역
왜 산에 사느냐는 물음에 시인은 웃기만 한다. 대답 대신 복사꽃이 물에 실려 간다.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꺾다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 산 기운은 해질녘에 아름답고 나는 새들은 짝지어 돌아온다 이 가운데 참뜻이 있으니 말하려 하나 이미 말을 잊었네
도연명 〈음주(飮酒)〉, 글뜸 번역
국화를 꺾다 고개를 드니 남산이 보인다. 말하려다 말을 잊는 마지막 줄에서 펜도 잠시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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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린 원문은 모두 저작권 보호기간이 지난 작품입니다. 외국 작품의 한국어 번역은 글뜸이 직접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