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큼 사랑해 주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야.", "내 아픔을 언젠간 너도 이해하게 될 거야." 이런 말들은 와닿지 않는 허풍일 뿐이었다.
정영욱 《구원에게》
10월 8일 · 느릿한 오후
길이별 한 편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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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욱 《구원에게》
절망은 무언가를 잃은 자리에 오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자리에 온다. 우리는 늘 어떤 사람이 되라고 요구받지만, 그 요구를 따르는 동안 정작 자기 자신과는 멀어진다. 절망은 그 거리에서 시작된다.
쇠렌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글뜸 풀이
Idet han fortvivlede over Noget, fortvivlede han egentlig over sig selv, og vil nu af med sig selv.
1849년 작 《죽음에 이르는 병》. 키르케고르는 절망을 무언가의 결여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어긋난 상태로 정의했다.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함, 그것이 그가 본 절망의 자리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의 표제시. 한용운은 떠난 님을 보내지 않았다고 말하며, 이별을 만남의 다른 이름으로, 침묵을 노래로 뒤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