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이고 눈의 깊이를 물었구나
마사오카 시키 하이쿠 (1896), 글뜸 번역
いくたびも雪の深さを尋ねけり
▸배경 이야기
1896년 결핵으로 병상에 누운 시키가 창밖을 보지 못한 채 곁의 사람에게 거듭 눈의 깊이를 묻는 모습을 적은 하이쿠. 보지 못하는 자의 호기심이 곧 살아 있음의 증거가 되는 자리다.
10월 5일 · 노을 지는 저녁
길이별 한 편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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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오카 시키 하이쿠 (1896), 글뜸 번역
いくたびも雪の深さを尋ねけり
1896년 결핵으로 병상에 누운 시키가 창밖을 보지 못한 채 곁의 사람에게 거듭 눈의 깊이를 묻는 모습을 적은 하이쿠. 보지 못하는 자의 호기심이 곧 살아 있음의 증거가 되는 자리다.
실수 없이 앎에 도달하는 건 불가능해요. 경험은 오랜 시간에 걸쳐 퇴적물처럼 쌓이는 거죠. 우리는 누구나 경험을 해봐야 해요. 그러고 나서 그 경험의 결과물을 확인해야 비로소 행동을 바꿔야겠다는 자각이 오죠. 그래야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돼요.
베르나르 베르베르 《죽음》
2017년 소설 《죽음》 2권, 세상의 악을 직접 벌하려는 영매를 상위 세계의 영혼이 제지하며 내놓는 대답. 옳음이 하루아침에 세워지길 바라는 마음과 더듬거리며 겹겹이 앉는 배움 사이의 거리를 가늠한다.
나는 숲으로 갔다. 뜻을 세워 살아 보고 싶었기에. 삶의 본질적인 사실들만 마주하고, 삶이 가르치려는 것을 배울 수 있는지 보고 싶었기에. 그리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내가 살지 않았음을 깨닫는 일이 없도록. 나는 삶이 아닌 것을 살고 싶지 않았다. 삶은 그토록 소중하니까. 꼭 그래야 하지 않는 한 체념을 연습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깊이 살며 삶의 골수를 남김없이 빨아내고 싶었다. 삶이 아닌 모든 것을 몰아낼 만큼 굳세게, 스파르타 사람처럼 살아, 넓게 베고 바싹 깎아 삶을 한구석으로 몰아 그 가장 낮은 바닥까지 줄이고 싶었다. 그리하여 삶이 비루한 것이라면 그 비루함의 참모습을 남김없이 얻어 세상에 알리고, 숭고한 것이라면 몸으로 겪어 알아 다음 길에서 참되게 전할 수 있도록.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내가 살던 곳, 내가 살던 이유〉, 글뜸 번역
I went to the woods because I wished to live deliberately, to front only the essential facts of life, and see if I could not learn what it had to teach, and not, when I came to die, discover that I had not lived. I did not wish to live what was not life, living is so dear; nor did I wish to practise resignation, unless it was quite necessary. I wanted to live deep and suck out all the marrow of life, to live so sturdily and Spartan-like as to put to rout all that was not life, to cut a broad swath and shave close, to drive life into a corner, and reduce it to its lowest terms, and, if it proved to be mean, why then to get the whole and genuine meanness of it, and publish its meanness to the world; or if it were sublime, to know it by experience, and be able to give a true account of it in my next excursion.
1854년 《월든》 2장 〈내가 산 곳, 내가 산 이유〉에서 숲으로 들어간 까닭을 밝힌 대목. 소로에게 숲은 은둔처가 아니라 실험실이었고, 그 실험이 무엇을 재려는 것이었는지가 이 한 단락에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