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드라미가 열네댓 가지쯤은 되겠지
마사오카 시키 하이쿠 (1900), 글뜸 번역
▸배경 이야기
1900년, 죽음을 1년 앞두고 마사오카 시키가 정원의 맨드라미를 보며 적은 하이쿠. 정확한 숫자를 세지 않고도 '열네댓 가지쯤'이라 짚는 호흡 안에, 떠나기 직전의 사람이 갖는 어림짐작의 평온이 묻혀 있다.
6월 27일 · 노을 지는 저녁
길이별 한 편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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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오카 시키 하이쿠 (1900), 글뜸 번역
1900년, 죽음을 1년 앞두고 마사오카 시키가 정원의 맨드라미를 보며 적은 하이쿠. 정확한 숫자를 세지 않고도 '열네댓 가지쯤'이라 짚는 호흡 안에, 떠나기 직전의 사람이 갖는 어림짐작의 평온이 묻혀 있다.
운명이 따로 와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작은 결들이 모여 결국 그 사람의 길이 된다. 성격이 곧 운명이다. 운명은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지의 다른 이름이다.
헤라클레이토스 단편, 글뜸 풀이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남긴 단편 119. '인간의 성격이 곧 그의 운명이다(ἦθος ἀνθρώπῳ δαίμων)'라는 한 줄에서, 그는 운명을 외부의 힘이 아닌 자기 자신의 누적으로 다시 정의했다.
그래, 그러면 죽게 되는 거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죽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안다. 서른 살에 죽든 예순 살에 죽든 결국에는 다 죽게 된다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어떤 경우라도 그 후에는 다른 남자와 여자들이 살아가게 될 테고, 수천 년 동안 그런 식일 것이다. 이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다. 지금이 됐든 이십 년 후가 됐든 죽게 될 것은 어차피 나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리. 카뮈는 모든 사람이 결국 죽는다는 가장 단정한 사실 앞에서, 한 사람의 부조리한 평화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