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는 자신이 홀로 죽고 잊히리란 걸 알고 있었다. 살아 있는 동안 누구에게도 소중한 존재가 된 적이 없으니 죽음 또한 누구도 안타깝게 만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은희경 《시간의 감촉》
1959–? · 한국 현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세한 거리를 가장 정직하게 그린 소설가
글뜸의 결로 만나는 은희경의 글귀 3편
안나는 자신이 홀로 죽고 잊히리란 걸 알고 있었다. 살아 있는 동안 누구에게도 소중한 존재가 된 적이 없으니 죽음 또한 누구도 안타깝게 만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은희경 《시간의 감촉》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그. 나는 그를 진심으로 특별히 사랑하고 있으며 심지어 어쩌면 내 생애에 단 하나의 '타인을 위한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반해 있다. 그가 내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요구하기만 한다면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분연히 버리고 그와 함께 남도로 떠나는 밤 기차의 창가에 청승맞으나 희망찬 포즈로 앉아서 그를 위해 삶은 달걀 껍질을 벗길 것이다, 얼마든지!
은희경 《새의 선물》
《새의 선물》에서 은희경이 짚은 결.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거듭 물어야 하는 자리를 가만히 새겼다.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위해 언제라도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나의 열정은 삶에 대한 냉소에서 온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으며 당장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것들만 지니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해왔다. 삶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그 삶에 성실하다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아이러니도 아니다.
은희경 《새의 선물》
1995년 작 《새의 선물》의 한 자리. 사랑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쉽게 사랑에 빠진다는 역설을, 어린 소녀의 시선으로 짚었다.